왕가리 마타이와 지율(한겨레)

2004년 11월 4일 | 성명서/보도자료

왕가리 마타이와 지율 2004년도 노벨 평화상은 인권운동가도 반전운동가도 아닌 아프리카의 한 여성 환경운동가에게 돌아갔다. 왕가리 마타이는 1977년 ‘그린벨트운동’을 시작으로 지난 30년 동안 온 아프리카 대륙에 약 3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이다. 마타이에게 나무심기는 무너져 가는 숲을 지키는 생태보존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개발이권을 독점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케냐의 부패한 정치가, 권력자들과 맞서는 민주화 운동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재 마타이는 케냐의 국회의원을 거쳐 환경부 차관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곽결호 환경부 장관은 10월26일치 〈한국일보〉에 ‘노벨평화상과 환경운동’이란 글을 기고하였다. 이 글에서 곽 장관은 노벨 평화상이 전례를 깨고 환경운동가에게 돌아간 점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였다. 환경운동가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이제 환경보호가 세계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인식이 국제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증거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환경부 차관을 거쳐 장관에 오른 그로서는 마타이의 수상이 남의 집 경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분께 묻고 싶다. 우리에겐 왕가리 마타이가 없는가? 마타이가 수도 나이로비 북쪽의 천연수림 카루라 숲에 조성되던 택지공사를 막기 위해 경비원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무를 심었던 것처럼 지율 스님은 천성산 고속철도 터널공사가 시작되자 온몸으로 나무를 지키기 위해 무지막지한 불도저 위에 올라가 저항하기도 하였다. 마타이가 카루라 숲을 구하려다 무장 괴한들의 공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던 것처럼 지율 스님도 국책사업 강행이라는 정부 방침에 맞서 천성산 숲을 구하기 위해 58일에 걸친 목숨을 건 단식을 하였고, 급기야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하였다. 작은 실천이라도 해야 한다는 장관이 어째서 지율 스님이 58일간 단식할 때, 그 56일째까지도 청와대 앞을 그냥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는지 묻고 싶다. 또 어째서 환경부가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환경영향 평가서를 작성하기로 해놓고 환경부 단독으로 법원에 평가서를 제출하였는지 묻고 싶다.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58일간 단식 끝에 겨우 얻어낸 약속을 어째서 이토록 쉽게 깨는지 정말 묻고 싶다. 왕가리 마타이라면 한 인간의 이토록 절박한 신념에 그토록 무관심하고 부주의하게 대응했을까? 그러나 마타이와 지율 스님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마타이가 카루라 숲의 무분별한 개발에 맞설 때 케냐의 변호사협회와 건축가협회가 그의 편이 되어주었다. 또 마타이가 3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을 때 수많은 케냐의 여성들과 아프리카 전역의 여성들이 연대하여 숲을 지키려는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지율 스님이 천성산을 구하기 위해 부산에서 38일간 단식을 할 때도, 청와대 앞에서 58일간 단식을 할 때도 도롱뇽 친구들을 제외하면 그에게 힘을 실어줄 단체들이 없었다. 변호사들도, 교수들도, 건축가들도, 그리고 심지어 많은 여성단체들 중 그 어디도 팔을 걷어붙이며 나서지 않았다. 마타이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비정한 사회에 살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율 스님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아프리카보다 더 어두운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한 여성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보여주는 신념과 용기는 마타이보다 더 절박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환경부는 마타이에게만 주목하고 있다. 미국 시인인 에밀리 디킨슨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만약 내가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다면, 그 고통을 달래줄 수만 있다면, 혹은, 할딱이는 울새 한 마리를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만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지율 스님은 스님이기 이전에 한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할딱이는 작은 울새를 다시 둥지에 넣어 주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지율 스님의 가슴앓이에 우리가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가 꼬리치는 도롱뇽과 천성산의 뭇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면의 밤을 새우며, 곡기를 끊고 애태우는 그 고통에 같이 손 내밀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희망적일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주의집중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우리가 한 여성의 이토록 절절한 호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국 머지않아 다음에는 우리의 어린아이들이 “침묵의 봄”을 맞게 될 것이다. 박혜영 인하대 교수·영문학 http://www.hani.co.kr/section-001005000/2004/11/0010050002004110319321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