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계양산에 갔다.
한달 만에 간 산은
벌써 가을이 와서 무거웠다.
봄과 여름에 견딘 시간들을
열매들과 잎들에 달고
깊어져 있었다.
톡, 배가 터져
배시시 웃고 있는 밤송이들
손에 쥔 것들을 내려놓을 시간
까맣게 타들어간 잎들
누렇게 말라버린 가지들
검게 그을러 기미가 낀 얼굴들
축축 늘어뜨리고
이제는
내려놓을 시간
내년 봄을 살기 위해
죽은 척 하기 시작하는 산
태풍이 휩쓸고 간 흙길에
깊고 빠른 물길이 만들어놓은
깊은 주름
드러난 흙의 단층
사이로
드러난 뿌리
키 큰 소나무가 땅 속에 품고 있던
털들은 자기 키보다 컸다
기다란 털들은 엉키고 엉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더 깊은 땅 속
어딘가에
닿을 털들이 바깥으로 드러나
빼빼 말라가고 있었다
소나무의 뿌리들과
이름 모를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를 부둥켜 안고
목마른 계절을 견디고 있었다
나무들의 깊은 연대
시냇물을 한 웅큼 떠서
한 모금 먹여주니
소나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나무는 고마웠는지
가장 굵은 생각을 나에게 하나 주었다
너도 버리라고
뿌리만은 남겨두고 버리라고
소나무와 이름 모를 나무들의
드러난 뿌리들을
살살 흙으로 덮어주고
도닥여주고 산을 통과했다
산을 나오는 동안
소나무의 기다란 손가락이 따라와
나의 메마른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나무들이 주는 깊은 연대
한 달만에 간 산에
거칠고 마른, 때에 절은,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은, 꽁꽁 숨겨두고 싶은
허접한 얼굴들을
뚝뚝 떨어뜨리고 왔다
버려도 버려도
다리가 무겁다
2010. 10.6 정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