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왜 식물들은 공존의 관계를 맺고 있을까?

2009년 9월 14일 | 회원소모임-기타

올해 처음으로 원당 초록누리에 함께 했습니다.
열정적인 생태공부모임 소문을 들어왔던터라 중간 중간 함께 하고 싶었는데
9월이 되어서야 함께 했네요. 

여울님의 잘 정리된 후기를 보고 저도 그때 나눈 이야기들을 다시 곱씹어보고
<식물의잃어버린언어> 책도 다시 들춰보았습니다.

발제 후 이야기 나눔 도중
초록지렁이님이 계속 핵심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하셨지요?

왜 식물들은 공존의 관계를 맺고 있는걸까? 
왜?

저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더 커다란… 진화한… 진보적인) 개념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일련의 본능적인 과정이 아닐까…하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공존이라는 관계맺음의 방식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보다 더 진화된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관련하여 
며칠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나 아래 덧붙여 봅니다.

연관성 있는 이야기 같네요~ ^——^*




정말 ‘진보’가 뭘까요?

이런 말은 정말 정의하기가 어려워요.
정의하기 어려운 말을 정의하는 방법은, 진보가 아닌 것을 찾으면 쉬워요.
절망에 빠지거나 패배감을 느끼는 상태는 진보가 아니죠.

진보는 쉽게 절망하지 않아요.
진보는 국가와 거리가 있어요. 자본과도 거리가 있지요.
권력화된 권위(종교 등)와도 멀죠.

진보는 이러한 것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어떤 경향성이죠.

사람이 늘 한계가 있으니까 언제나 이런 거리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살 수는 없어요.
가끔 절망하기도 하고. 국가나 자본의 힘에 끌려가기도 하고,
권위에 의지하기도 해요.
이런 흔들림이 늘 있지만,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꾸준한 노력,
그런 경향성, 흐름 이런 정도에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진보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요.

 결국 이 말은 ‘진보’ 대신에 ‘진리, 평화’ 이런 말을 넣어도 돼요.

어떤 정의를 명확히 정의하면 오히려 의미가 왜곡되는 말들은
그것이 아닌 것 어디쯤에 있을 것이라고 해두는 게 상상력을 키울 수 있어요.

  

Conviviality – 공생공락의 즐거움으로 진보를 이해함

 

 많은 사회 이론가들이 경제와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사회 이론을 구성할 때,
‘우정’을 중심에 두고 사회를 구성하는 걸 연구한 학자가 있어요.

 이반 일리치 – 라는 분인데

그의 생각은 ‘Conviviality‘ 라는 말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어요.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말인데, 사전을 찾아보면 ‘우정, 여유, 즐거움’ 이라고 돼 있는데,
이 한 단어 안에 이 뜻이 다 들어있어요.

김종철 선생님은 ‘공생공락’으로,
박홍규 선생님이나 이한이라는 분은 ‘자율적 공생’으로 번역하기도 해요.
내용으로는 노무현 대총령이 꿈꾼 ‘사람사는 세상’과 비슷해요.

즐거움 속에서 미래를 열어가는 실천이 있는 것.

삶을 나 혼자의 문제로 보지 않고 ‘더불어 사는 문제’로 보는 것.

‘함께 살고 함께 즐거운 사회’라는 지향점을 가진 즐거움,

 
이런게 ‘Conviviality’에요.

 ….

우리가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상식의 오류가 있어요.
‘인간에게 우열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마지막으로 해내야 할 혁명적 과제의 하나입니다.

보따리 학교는 이런 걸 실험하는 곳입니다.

 

혁명적이고 엄청난 지향점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즐겁고 여유있어요.

아무도 애쓰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서로 신뢰하게 되고, 우정이 생겨나요.

바로 Conviviality 죠.

공생공락의 즐거움을 여유롭게 누리는 거죠.

 

– 김재형(보따리학교 교사 / 생명평화등불 7-8월호 中

 


화학물질을 통한 초식동물과 식물의 소통은 공진화의 주요한 추진력이다. 
: 식물의 잃어버린 언어 7장-식물은 모두 위대한 화학자 中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