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앎보다 실천(경향신문)

2015년 9월 2일 | 책산책


[서민의 어쩌면]앎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서른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독서는 내 삶을 180도 바꿔 놨다. 나밖에 모르고, 사회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던 내가 이제는 사람들 앞에 서서 사회 정의에 대해 떠들고 있으니, 뽕나무밭이 바다가 된 격이다. 책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서가인 CBS 정혜윤 PD는 이렇게 말한다.

“책에는 좋은 말이 많잖아요. 요즘 세상에서 책이 아니면 그런 말들을 어디서 듣겠어요? 그 말들을 듣다 보면 스스로 변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지난달,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가면서 6권의 책을 가져갔다는 게 보도됐다. 휴가지에서 책을 읽는 대통령이라니, 멋져 보인다. 그가 가져간 책들은 다 나름의 의미를 지닌 것들이다. <저지대>에 대한 해설을 보자.

“1960, 1970년대 인도와 미국을 배경으로 시대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런 멋진 말도 나온단다. “죽음 앞에서 우린 평등해. 그 점에선 죽음이 삶보다 나은 것 같아.”(93쪽) <올 댓 이즈>도 한 남자의 삶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사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는데, 이런 책들을 읽으면 삶이 무엇인지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지구에서 사라져 가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로, 개발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겠다. 비단 오바마만이 아니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나 3대 대통령인 제퍼슨은 장서가 수천권인 애서가였고, 후임 대통령들 중에도 알아주는 독서가가 꽤 많았단다. 나름의 한계는 있을지언정 미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중요한 가치가 된 것도 이런 전통 덕분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책 하면 떠오르는 분은 1만7000권의 책을 소장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그는 비서실장이 골프를 권하자 이렇게 말했단다. “좋은 운동이지요. 그런데 골프 한 번 치려면 서너 시간은 걸리죠? 그렇다면 책을 한 권 읽을 시간인데, 독서가 낫지 않을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책을 좋아해, 휴가 때는 물론이고 탄핵 소추를 당했을 때도 책을 읽으며 보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떨까? 고백하자면 난 박 대통령에게 편견을 갖고 있었다. 책과 그다지 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대통령이 된 뒤 첫 번째로 간 2013년 여름휴가 때 박 대통령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모래밭에 글씨를 쓰며 놀고 계시던데, 그 사진은 기존의 편견을 더 강화시켜 줬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경남신문 기사의 한 구절을 보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 바로 ‘독서’다. 박 대통령의 삼성동 자택을 방문한 기자나 보좌관들은 누구나 놀란다고 한다. 원인은 2층 서재의 박근혜가 읽은 수많은 책 때문이다.”

이번 여름휴가 때도 박 대통령은 책만 읽으며 보냈다고 한다. 오바마와 달리 박 대통령이 휴가 때 무슨 책을 읽었는지 자랑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좌파들은 ‘읽는 책의 수준이 낮아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출판사가 소외받을까봐”란다. 실제로 대통령이 읽었다고 공개한 책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은 바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독서가의 한 명으로서 대통령이 책을 좋아한다니 다행이긴 하다. 좀 의아하다 싶은 건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 분이 왜 서른 이전의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시는 것이냐다. 말씀에 두서가 없는 것도 그렇고,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문제가 생기면 아랫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책과 담을 쌓은 분 같다. 세월호 유족들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미스터리다. 책을 많이 읽었다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의 슬픔을 능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분들을 무슨 기생충 보듯이 하셨으니까. 비슷한 사례가 있긴 하다. 2000년 미국 대통령이 된 부시도 독서 애호가였단다. 바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2006년부터 3년간만 따져도 200권 가까운 책을 읽었으니,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는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이라크전을 일으켰고, 평상시 모습에서도 독서를 통해 길러지는 지성이나 배려 같은 덕목을 찾아보긴 힘들다. 이분들은 도대체 왜 이런 걸까?

문제는 앎과 실천의 괴리일 것이다. 책을 읽고 아무리 좋은 교훈을 얻는다 해도 그게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다시금 정혜윤 PD의 말을 인용한다.

“책을 읽고 나서 나와야 할 진짜 좋은 질문은 ‘이 책을 읽었으니까 다음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것이에요.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한테 던질 때 책이 나를 변화시키는 조언이 될 수 있어요.”

이제 가을이다. 책을 읽고 그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자. 그렇지 않는다면 몇 트럭의 책을 읽는다 해도 변하는 건 없다.

< 단국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