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순례후기] 안녕~ 내가 걸어갔던 길들아~
글- 회원 박상미(고라니)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모두 다 가볼 수는 없어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오래도록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이
굽어져 안 보이는 곳까지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하나의 길을 택하였다.
그 길은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풀이 우거져 사람을 부르는 듯했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은
먼저 길보다 좀 덜하기는 했지만…….
D-7.
단풍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순례를 떠난다는 나에게 주위 사람들은 부러움 반 걱정 반의 이야기들을 한다.
중요한 것은 아직 남편과 아이들에게 얘기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아이들에게 운을 떼 본다.
큰 아이는 엄마 눈을 피하지도 않고 음흉한 미소를 씩 날린다.
누가 더 솔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절반은 통과다.
그래 요놈들아 엄마없이 실컷 자유를 누려 봐라. 잔소리 없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지,
이런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노?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현관문에 새끼발가락을 세게 부딪쳤는데 멍이 들었는지 발톱이 시커매진다.
남편 왈, ‘당신 이제 아무데도 못가겠네~’ 아니 어찌 알았을까? 에고, 오늘은 말할 기회가 아닌가 보다.
그리고 알아서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네요. 어찌 되었든 떠납니다요!! 출발~~~
그곳이 강원도 삼척에서 시작해서 울진으로 넘어가는 울진 숲길이어서 더 그런 것 같다.
나와 남편이 태어난 곳, 강원도. 그리고 시부모님이 살고 계신 삼척.
그곳에 내가 가서 발걸음을 남긴다는 것이 얼마나 대견한가.
걷는 것은 무척 힘들지만, 걷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걱정이 치유되는 기억 때문이었다.
운전을 배우고 나서부터 걸어 다니는 일도, 버스를 타는 일도 새삼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탄 버스가 고속도로에 들어서고,
고속도로 주변 풍경에 아파트나 큰 건물이 없어지면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모습들이
언제 저런 곳에 저런 것이 있었나싶게 낯설다.
일 년에도 몇 차례나 오르내린 그 길인데도 운전대를 잡고 있어서 보지 못했던 걸까?
시골의 작은 터미널이라서 그런지 이 사람 저사람 붙잡고 물어보지만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이가 없다. 사람들이 여행을 오더라도 차를 운전해서 이동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점점 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더 불편해지고, 그래서 또한 더 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이런 시스템을 조금 바꿀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울진 터미널에서 통고산 자연휴양림을 찾아가는 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계곡이 아찔하다.
정신없이 인사를 하고 밥을 먹고 나니 이제야 순례단에 합류한 느낌이 온다.
식사 후 프로그램으로 토론극이 진행되는데 울진 숲길을 걷고 난 순례단이
울진지역의 현안 문제에 대한 역할극을 한다.
숲길 걷기를 하지 못한 나는 무슨 말인지 벌쭘하지만
그래도 능청스런 각자의 연기에 감탄을 하며 배꼽을 잡았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을 자야 하는데 새로운 날이 시작되겠구나 뒤척뒤척 잠이 오지 않는다. .

가파르게 오르다가 내리다가 이어지는 숲길이 정상을 향해 치고 올라가는 등산이라기보다는, 조용히 걸으며 자연을 만나는 과정으로 다가온다.
지천으로 산철쭉이, 발밑에는 은방울꽃이, 둥굴레꽃이, 멀리서 가까이서 아까시 향기와 쪽동백의 단아한 향기가, 쇠물푸레의 향기가 숲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 더욱 짙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면 자연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산을 오르면서 내려다보이는 포장된 도로는 꼭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산을 깎아내고 무자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몇 명의 듬직한 남자 순례단이 앞선 걸음으로 길을 만들고 천을 건너야 할 곳에 돌다리를 만들어 건네주는 스릴만점의 특공작전이 시작되었다.
빗속에서 먹는 점심 또한 일품이다. 나뭇가지 위에 우비를 걸쳐 천막을 만들고 그 밑에 쪼그리고 먹는 주먹밥의 맛. 다시 또 언제 내가 이런 주먹밥을 먹어 볼 수 있을까?

모둠을 나누었는데 우리 모둠은 천축산에 들었다. 가는 길에 만난 마을에서는 비개인 후 논에 나온 농부가 모내기에 한창이다. 촌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에 호기심으로 걸어 나온 아가의 표정이 천진하다. 바람에 누웠다 일어났다 일렁이는 청보리밭의 두근거림도 만난다.
천축산에서 특이하게 본 것은 송이채취꾼이 만들어 놓은 소나무 숲의 흔적이었다. 불 땐 자국이며 장판까지 있어 며칠 밤낮을 길게는 한 달씩 이곳에 생활하면서 송이를 채취해서 내려간단다. 감시할 인력도, 그럴만한 의지도 없어 보인다고 하는데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울진에서의 기억은 한 평생 나의 마음에 남아있을거야.
그래서 가끔 살다가 지치고 힘들 때 꺼내 볼 수 있는
청량제 역할을 해 줄 것 같아.
안녕~ 내가 걸었던 길들아.
바람아.
비야,
구름아.
나뭇잎아.
길이 그곳에 있다.
사람들은 그 길 끝에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떠난다.
나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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