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울거리는 물결 따라 3년 만에 다시 찾은 장봉도

2014년 6월 24일 | 섬•해양

▲ 올해 4회째를 맞는 파랑기자단이 장봉도 탐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사진제공=파랑기자단

너울거리는 물결 따라 3년 만에 다시 찾은 장봉도

바다에서 인천의 미래를 보다
2014 청소년기자단 파랑과 함께

 

4기 파랑기자단의 첫번째 섬 탐사가 시작됐다.

출발 당일, 오전 일찍부터 영종도에 모인 우리들은 장봉도로 향하는 배에 올라 새롭게 시작하는 여정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었다.

사실 세월호 사고 이후 배편을 이용하는 여행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을거라 생각했지만 영종도 삼목선착장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북도면 섬으로의 출발을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잔잔한 바다 위를 세차게 가르는 배 뒤로 새하얀 개미떼 같이 갈매기들이 쫓아오는 모습을 보니 세월호 사고로 인한 불안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영종도 삼목선착장을 출발한 지 1시간이 채 못 걸려 도착한 장봉도, 근처에 인천국제공항이 있어 그런지 비행기가 섬 하늘 위로 요란스레 지나간다.

장봉(長峰)이란 이름은 섬에 길게 봉우리가 늘어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 처럼 장봉도는 봉우리들을 이어 섬을 종주하는 2~6시간의 트레킹 코스로 등산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선착장에서 10분 정도 떨어져있는 별바다 식당으로 가는 중간마다 그림과 시가 벽에 그려져 섬을 찾은 기자단을 반기듯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발걸음이 가볍다.

3년 전 파랑기자단 1기 선배들이 찾았던 섬을 4기 기자단이 다시 찾는 여정의 시작을 앞둔 설렘과 섬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를 여과없이 전해야겠다는 책임감이 교차하고 있다.

드디어 시작이다.

4기 기자단 첫 목적지 영종도서 배로 1시간

인어상·말문고개 등 이야기 간직한 섬마을

길게 늘어선 봉우리 종주 등산객들에 인기

▲ 장봉선착장 앞에 세워져 있는 인어상.

▲ 인어의 전설을 찾아서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완행 카페리 선박을 타고 신도를 거쳐 장봉도 장봉선착장에 도착한 기자단을 맞이한 것은 인어상.

장봉 주민들은 은혜갚은 인어를 기리기 위해 인어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장봉 역사에 대해 관광객들에게 해설하고 있는 홍순일씨는 “옛날 장봉도 앞 어장에서 최씨 부부가 인어를 잡았는데 불쌍히 여겨 산 채로 놓아주었더니 그 때부터 그물만 던지면 만선을 이뤘다”며 인어와 얽힌 전설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서는 인어상에 대한 또 다른 말도 나온다.

인어상 위치가 관광객들이 많이 볼 수 있도록 선착장에 설치돼 있어 이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수 장봉2리 이장은 “인어 이야기는 사염과 날가지섬 사이에서 전해진 이야기”라며 “원래 사염과 날가지섬 사이를 볼 수 있는 ‘야달’이라는 지역에 있던 것을 관광객들이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선착장으로 옮겼는데 원래 자리로 다시 돌려놓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 구황불망비.

▲말문고개와 구황(救荒)불망비

장봉도에 큰길을 따라 올라가게 되면 장봉도에서 말문고개가 나온다.

가는 길 주변으로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벚꽃철이면 도로 주변이 온통 벚꽃향이 넘실거릴 것 같다.

말문고개라는 이름을 알려주듯 섬 능선을 잇는 구름다리 입구에 큰 황토색 말 조형물이 고개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있다.

사실 말문고개라는 이름은 이곳 주민들에게는 역사의 흔적이다.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어명으로 기마병을 양성할 목적으로 말의 수가 늘어났지만 너무 많은 말에 의해 농작물 피해가 커지는 탓에 농민의 생계가 위협받는 문제가 생겼다.

이에 결국 말들을 섬으로 유배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말들이 섬 주민들이 사는 마을로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고개에 담을 쌓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 계기가 돼 ‘말문고개’라는 지명으로 전해졌다.

현재는 담의 위치를 알려주는 석성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고전서적인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길을 따라 면사무소가 위치한 마을에 들어서면 한문으로 적힌 비석이 면사무소 한 켠에 쓸쓸히 서 있다.

이 비석은 조선 중기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던 주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진사와 참봉의 위업을 마을사람들이 기억하기 위해 세워놓았다고 한다.

진사와 참봉은 현재로 비교하면 면장과 이장이다.

이들은 조선 중기의 신축년 가뭄으로 인해 장봉도의 주민들이 보릿고개로 다 죽어가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마을 사람들에게 조곡 10가마를 풀어서 나눠 주었다.

이를 안 임금이 이들의 행동에 감동해 상을 내렸고 조선 말기에 후손들에 의해 이들의 업적을 적은 비석을 세웠다.

면사무소 한 켠에 쓸쓸히 방치되다시피한 비석을 바라보며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이를 본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학교, 시간의 흐름을 담다

장봉초등학교에 이르니 한적한 오후 따사로운 햇살아래 어린이 몇 명만이 드넓은 잔디운동장 위를 독점하듯 신나게 축구를 즐기고 있다.

학교 앞에는 책을 읽는 소녀 동상, 애국애족 비석, 통합기준점 등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들이 학교의 역사를 대표하는 듯 했다.

하지만 장봉초등학교는 장봉도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김정수씨는 “원래 장봉초등학교는 독자적으로 운영을 했는데, 사람 수가 줄어들면서 지금은 삼목초등학교의 분교로써의 역할을 한다”고 말하며 갈수록 줄어드는 젊은 사람들로 인해 오랜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가 분교로 전락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했다.

1100명, 350세대가 사는 섬 장봉도. 가막머리와 야달, 말문고개, 장골, 제비물, 한들 등 아름다운 우리 옛 지명이 살아숨쉬는 섬을 보며 집 근처 공원나들이 하듯이 하루 이틀 한번쯤은 찾아 복잡한 도심이 아닌 한적한 섬에서의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하고 생각해본다.

/송예준(김포고·2년)·정리=김상우 기자 theexodus@incheonilbo.com

■장봉도 주민 인터뷰

“더위 식혀줄 녹음·해수욕장 일품” – 김영순 할머니

“6·25에도 별다른 피해가 없던 곳입니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지요. 지하수가 흘러 물이 부족할 일도 없고, 자연 경관을 어느 곳보다 잘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김영순(75·여)씨는 장봉도에 대한 자랑을 늘어놨다.

춘하추동을 가리지 않는 시원한 녹음과 여름에는 특히 멋진 해수욕장이 일품이라고 한다.

사시사철 언제나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바쁜 생활에서 잠시 쉬어갈 시간을 마련해 주는 곳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관광객에 대한 반감도 있다고 한다.

김씨는 “자연경관을 해치는 쓰레기들이 들끓는다”며 “쓰레기는 다시 가져가는 올바른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지닌 장봉도도 60년대 이농현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장봉분교로 변해버린 장봉초등학교 재학시절, 학급당 약 30여명의 학생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한 학년에 1~2명밖에 없어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김씨는 슬하에 1남4녀를 둔 단란한 가정의 어머니다.

장봉도에서 버스기사를 하는 아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누구보다 착한 며느리와 인형 같은 손주들과 함께 있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씨는 “아무런 탈없이, 이렇게 행복을 느끼다가 세상을 떠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며 현재 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김종선(대인고·1년)

“자취 감춘 갯벌 … 김 양식도 주춤” – 김선만 어촌계장

인천공항이 열리고, 주변에서 간척사업이 벌어지면서부터 장봉도 주민들의 생활도 변하고 있다.

이전에 채취하던 바지락은 갯벌이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

한때 바지락으로 목돈을 만든 사람들은 이미 장봉도를 떠났다.

지역 특산물인 ‘장봉김’ 역시 변화한 자연환경의 영향에 안전하지 못했다.

김은 낮은 기온에서 자란 것을 최상품으로 친다.

하지만 급속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수온이 높아져 장봉김 역시 그 맛과 향이 확연히 떨어지게 된 것이다.

지난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인천공항이 생기면서 주민들은 어업활동 중단을 명받았다.

보상금을 받기는 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섬 주민들의 주된 수입원은 바다에서 나오지만 어업을 할 수 없으니 장봉도를 떠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장봉도 어촌계장 김선만(58)씨는 “당시 김 양식을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폐업했다”며 “섬을 떠났다가 적응에 실패해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이어 “평생을 바쳐 해오던 일을 갑자기 못하게 됐을 때 허탈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장봉도는 현재 김양식과 함께 농사도 병행하는 생활양식을 갖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50~60대이다보니 생산력은 매일 떨어지고 있다.

김씨는 “장봉도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며 “제발 지금 이대로만 보존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채지윤(고잔고·1년)

“역경 이겨내고 한평생 일궈온 터전” – 김정수 토박이

장봉도 토박이 김정수(72)씨는 장봉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평생을 장봉도에서 지냈고 어업, 농업 등 장봉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었다.

김씨는 17살 때부터 어업에 몸을 담았다.

당시 김양식을 하기엔 기술이 모자라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맨손 어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큰 태풍이 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고, 김씨는 19살 때부터 땅을 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년이 흐른 후 인천공항이 들어섬에 따라 김씨는 농업에 더 집중했다.

현재 김씨는 13년째 벼와 포도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자신의 포도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다.

김씨는 “우리 포도즙은 100% 포도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것과는 향부터가 다르다”라며 “도시의 사람들이 한번 먹어보면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곤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농업과 어업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태풍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태풍으로 인해 어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포도알이 떨어져 수입에도 큰 타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이런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일어섰다.

김씨는 “현재에 불만을 갖기보다 이를 이겨낼 노력을 해야 한다”라며 “투박한 손이 말해주듯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같은 생활도 없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이어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장봉도를 향한 사랑은 식지 않는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이지윤(서운고·2년)

●4기 파랑기자단 명단

김영수(남) 인천예일고 1년
채지윤(여) 인천고잔고 1년
김종선(남) 대인고 1년
이주연(여) 부천여고 2년
정소현(여) 인일여고 2년
류지인(여) 학익여고 2년
추선희(여) 영종국제물류고 2년
홍단비(여) 영종국제물류고 2년
김예림(여) 인일여고 2년
이지윤(여) 서운고 2년
송예준(남) 김포고 2년
강수민(여) 인명여고 1년
강수연(여) 인명여고 1년

인천일보&인천녹색연합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