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인천섬연구모임, 섬연구총서1_교동도 발간
인천섬연구모임(공동대표 김원, 최중기, 최원식)에서 인천섬연구총서 첫 번째로 기획한 섬연구 총서 “교동도”를 발간했다. 이 책은 연륙교가 만들어지면서 변화될 교동도를 집중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섬의 보존과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어 주목된다.
인천섬연구모임은 2011년 인천 연안 섬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보존과 발전을 위해 결성된 연구모임으로 그 동안 인천 섬들에 대한 꾸준한 답사와 답사보고회를 통해서 인천 섬들을 연구해왔다. 그 첫 번째 성과로 “교동도” 섬연구 총서를 발간했다.
이 책은 1부 교동도의 역사적 의미, 2부 교동도의 문학과 종교, 3부 교동도의 해양, 식생, 조류, 지리가 4부에서는 좌담회와 교동도의 현재성과 생활을 다루고 있다.
1부에서는 교동도에 대한 소개와 교동도의 역사적 특성, 교동도 갯벌매립의 역사, 교동도 근대 역사: 한국전쟁과 전쟁이 남긴 것 등 교동도의 역사적 의미를 다루고 있다. 2부에서는 교동도의 누정시, 교동도의 개신교 전파와 수용, 박두성, 세상의 빛이 된 사람 등 훈맹정음의 창시자 박두성을 비롯하여 교동도의 문학과 종교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3부에서는 교동도 주변 하구의 해양학적 특성, 교동도의 조류, 교동도의 식생, 교동도의 마을 유래와 특징 등 교동도의 해양, 식물, 조류, 지리 등을 기술하였다. 4부에서는 교동도 주민 구술생애사와 교동도 기행과 역사 유적, 교동도 좌담회 등이 실렸다. ‘좌담회’에서는 교동읍성을 비롯한 화개산성 등에 대한 복원을 섬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훼손된 문화재가 발굴되고 보존되어 교동도가 역사 문화의 섬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여망하고 있다.
특히 ‘교동 주민 구술 생애사’를 통해서는 교동도의 문화인 곱샘이놀이, 후엉잽이, 아홉동, 효자 이야기를 통해서 교동도의 생활사를 생생하게 구술하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교동도의 흉년과 기근으로 마마와 홍역이 창궐하던 증언과 섬이라 물이 부족하여 건답직파와 자연 저수지인 ‘물꽝’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던 일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이후 저수지를 개발하여 섬이면서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교동도의 특색이 흥미롭게 구술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 책에 참여한 저자들은 인천섬연구모임 회원을 비롯하여 인하대 교수, 조류 및 식물연구자, 교동도 향토사학자 등이 다채롭게 참여하여 교동도의 역사, 문화, 해양, 자연생태, 인문지리, 생애사 등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책은 유서 깊은 교동도가 방치된 섬이 아니라, 역사문화의 섬으로 재탄생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 교동쌀을 비롯하여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던 교동읍성, 경기만과 해주, 황해도 연안을 비롯하여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던 포구가 지니고 있었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 현재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 교동도의 발전 방향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연구 성과를 내보이고 있다.
인천섬연구모임에서는 인천섬 연구총서 두 번째 시리즈로 ‘덕적도’를 기획하고 있어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앞으로도 인천섬연구모임은 인천의 섬들에 대한 연구서를 지속적으로 발간할 계획에 있다. 민속원, 312쪽, 가격 29,000원.
문의 : 이세기 운영위원장(문학박사,시인) 010-3282-5508,
장정구 간사(인천녹색연합 정책위원장) 010-3630-3437,
민속원 02-804-3320
인천섬 연구총서 1 교동도 목차
머리말
제1부 교동도의 역사적 의미
교동도喬桐島에 대한 소개_ 최중기
1. 일반현황
2. 해안지형의 특성
3. 교동도 포구와 항로
4. 교동문화 보존 위원회 한기출 위원장과의 대담
5. 교동도의 유적과 관리상태
6. 교동도 방문 후기
교동도의 역사적 특성_ 이영호
1. 머리말
2. 교동도의 지리와 연혁
3. 교동도의 정치․군사적 기능
4. 교동도 사회의 형성과 근대적 전환
5. 맺음말
교동도 갯벌매립의 역사_ 배성수
1. 교동도의 지리적 환경
2. 간척의 배경
3. 고려시대, 간척이 시작되다
4. 간척기술의 발달과 간척지의 확장
5. 일제강점기 대규모 농장의 개발
6. 간척지의 안정적이고 집약적인 활용
교동도 근대역사:한국전쟁과 전쟁이 남긴 것_ 김귀옥
1. 머리말
2. 열린 섬에서 닫힌 섬으로:한국전쟁에 의해서 바뀐 교동도
3. 한국전쟁과 슬픈 섬, 교동도
4. 한국전쟁 이후의 교동도 사회의 변화
5. 맺음말
제2부 교동도의 문학과 종교
교동도의 누정시_ 이영태
1. 누정의 개념과 전개
2. 교동도 누정의 현황과 누정시
3. 결론
교동도의 개신교 전파와 수용_ 최인숙
1. 교동도와 감리교 12교회
2. 감리교의 교동도 전파 과정
3. 교동도에서의 감리교 전파
4. 교동도에서의 감리교 수용
5. 교동읍교회의 상룡리 이전
박두성, 세상의 빛이 된 사람_ 구본선
1. 박두성이 태어난 곳, 교동도
2. 박두성, 기독교로 개종하다
3. 박두성은 어디에서 공부를 했을까?
4. 이동휘와 만남, 보창학교 입학
5. 보통학교 교사 박두성(1906년~1913년)
6. 제생원 맹아부 교사 박두성이 훈맹정음을 반포하다
7. 육화사, 점자 통신교육을 실시하다
8.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인가? 맹인들을 위한 점자 성경을 만들자
제3부 교동도의 해양, 식물, 조류, 지리
교동도 주변 하구의 해양학적 특성_ 최중기
1. 서론
2. 교동도 주변의 해양특성
3. 교동도 주변 해역 생태환경과 생물상
4. 교동도 주변의 어업
5. 교동도의 포구
6. 강화조력발전
7. 결론
교동도의 조류_ 김대환
1. 교동도의 자연, 지리적 환경
2. 교동도의 조류-현지 조사
3. 교동도의 조류-문헌 조사
4. 고찰
교동도의 식생_ 송홍선
1. 서언-조사 배경 및 목적
2. 조사 지역 및 방법
3. 조사 결과
4. 결론 및 요약
교동도의 마을 유래와 특징_ 한기출
1. 교동도 마을별 유래와 특징-상룡리
2. 교동도 마을별 유래와 특징-봉소리
3. 교동도 마을별 유래와 특징-대룡리
3. 교동도 마을별 유래와 특징-난정리
제4부 교동도의 생활문화와 현재성
교동도 주민 구술생애사_ 이세기
교동 600백년, 교동도의 생활문화-전웅섭(全雄燮, 1940년생), 황정자(黃貞子, 1940년생)
1. 600백년전 교동에 입도한 온전 전씨
2. 어린 시절 구산, 무서웠던 뚱구지
3. 전쟁보다 더 무서웠던 마마와 홍역
4. “이티 흉년에 뭐 이꽈네”, 신축년 흉년
5. 피난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룡시장
6. 초등학교 때 전쟁에 대한 기억
7. 7시간 걸리던 인천 뱃길
8. 건답직파와 ‘물꽝’으로 농사짓던 시절
9. 곱샘이놀이, 후엉잽이, 아홉동과 교동떡
10. 할머니를 살린 교동 효자 이야기
11. 섬이면서도 농사가 자랑인 섬
12. 훼손된 문화재의 복원을 기대하며
교동도 기행_ 김현석
1. 갈매기가 사라진 포구
2. 화개사 소나무에 걸린 석양
3. 세 개의 섬, 두 개의 저수지
4. 철조망과 포구
5. 지석리 할머니
교동도의 역사유적_ 김현석
1. 경원전慶源殿터
2. 갈공사葛公寺터
3. 고읍성古邑城
4. 고읍 형옥刑獄터
5. 화개산 봉수대
6. 교동향교
7. 교동읍성
8. 연산군 적거지謫居址
9. 화개산성
10. 삼도수군통어영지
11. 부근당扶芹堂
12. 진망산 봉수대
13. 화개암華蓋庵터
14. 읍내리 비석군
15. 사신당使臣堂
16. 수정산 봉수대
17. 인사리 석불입상
교동도 좌담회
교동도의 현재를 말한다
1. 문화와 역사의 보고, 교동도
2. 방치된 문화 유물들
3. 연륙교로 인한 변화상
4. 분단이라는 민통선 접경이 미치는 교동도
5. ‘문화교동’이라는 미래 가치와 활로
찾아보기
교동도는 강화도에서 불과 4∼5km 떨어진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그러나 남, 북 분단으로 1955년부터 민통선 북쪽에 위치하게 되면서, 그 지정학적 중요성이나 역사적 의미, 해양학적 중요성을 상실한 채 잊혀진 섬, 바다를 빼앗긴 섬으로 오랫동안 외면받아 왔다. 교동도는 서해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한강하구의 입구에 위치하여 한강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북으로 황해도와 연결되고 남으로는 강화도 남단과 인천을 거쳐 경기만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한강하류를 통하여 서울과 경기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고, 서쪽으로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 갈 수 있는 해상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교동도는 역사적 중요성만큼 많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개산성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에 설립한 향교가 있으며, 연산군 적거지, 고구리 읍성터, 삼도수군통어영터, 교 동읍성, 화개산 봉수대, 경원전터, 남산포의 수군 선착장과 계류석, 중국 사신들이 머물렀던 사신관터, 교동도의 가장 큰 나루터였던 동진나루 등 많은 역사적 유적이 있다. 그러나 교동향교 외에는 거의 관리가 되지 않아 성문은 부서지고, 성벽과 관청의 돌들은 민가의 주춧돌이 된 지가 오래이다. 관청 축대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일본식 폐가가 아직도 남아 있지만 훈맹정음의 창시자인 박두성 선생의 생가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교동대교 건설로 이와 같은 유적지와 유물의 훼손이 앞으로 더욱 많아질까 우려된다.
– ‘머리말’ 필자 대표 최중기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