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11공구와 산반제갯벌

2008년 8월 28일 | 성명서/보도자료

                                                  송도11공구와 산반제갯벌

                                                                                               장정구 인천녹색연합 사무국장

 얼마 전 고잔갯벌(일명 송도11공구)을 매립하기 위한 사전환경성검토에 대해 주민공청회와 주민공람이 있었다. 많은 인천시민들이 인천연안의 마지막 갯벌인 고잔갯벌을 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업무, 물류단지, 주거시설 등 외국인이 들어와서 주거할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외국투자유치가 어렵다’며 인천시는 매립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는 1990년대까지 송도11공구와 비슷한 면적으로 매립계획이 수립되었다가 취소된 산반제갯벌이라는 곳이 있다. 산반제갯벌은 나리타공항에서 자동차로 도쿄시내로 향하다 보면 펼쳐지는 동경만에 위치하고 있다. 동경만은 지리·생태적으로 우리나라의 경기만(한강하구를 중심으로 북쪽의 장산곶과 남쪽의 태안반도 사이에 있는 반원형의 만, 즉 인천앞바다)과 같은 곳이다. 오래 전부터 항만개발 등으로 대규모 갯벌매립이 이루어졌다. 그곳의 산반제갯벌은 시민들의 노력과 자치단체장의 의지로 매립계획이 취소되어 지금은 해변공원, 갯벌학습장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치가와지구와 케이요항 개발계획의 일부였던 산반제갯벌은 인천의 고잔갯벌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와 호주를 오가는 도요물떼새의 중간기착지일 뿐 아니라, 조개류·갑각류·숭어·농어 등 각종 어류의 산란·생육장이다. 이들의 먹이가 되는 해초류·바다생물·플랑크톤·소형 갑각류 등 각종 저서생물도 풍부한 곳이다. 그런 산반제갯벌은 1950년대 후반 동경만 1만5200ha에 이르는 대규모 매립계획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었다. 이에 1960년대 후반부터 시민들을 중심으로 조수보호구 설치를 요구하며 대규모 갯벌매립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치바갯벌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갯벌보전을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갯벌이 단순한 야생조류의 서식지가 아닌 생명의 요람이고 생태계의 중요한 지역이며, 정화작용과 어업 등으로 사람들에게도 유익한 장소라는 점이 인식되었다. ‘갯벌’ 그 자체가 보전가치가 높은 곳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동산거품이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토지가상승 등을 이유로 매립계획을 강행하려던 일본정부와 치바현은 1992년 민관환경회의를 구성,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95년 환경회의에서는 산반제갯벌의 자연환경과 매립의 영향에 대해 조사를 실시할 것과 토지이용의 필요성을 재검토하고 전문위원회 설치를 제안하였다. 환경회의의 조사결과 수질정화기능 등 산반제갯벌의 환경·생태적 가치를 확인하고 갯벌을 추가매립하게 되면 동경만이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결국 2001년 3월 치바현지사 선거에서 갯벌매립 백지화를 주장한 후보가 당선되면서 산반제갯벌 매립계획은 일단락되었다.

  올 10월이면 우리나라 경남 창원에서 환경올림픽이라는 람사르총회가 열린다. 일본에서는 이미 33곳이 넘는 습지가 람사르협약에 등록되어 있음에도 산반제갯벌을 등록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란다. 그러나 정작 개최국인 대한민국은 새만금·시화호 등으로도 부족하여 수십만㎢의 갯벌을 추가매립하려 하고, 인천시는 세계 5대 갯벌이라는 인천갯벌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 하고 있다.

  정확한 경제성과 수요공급에 대한 예측없이 진행되는 항만확장계획의 무모함에 맞선 치바현시민들과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비경제성과 반환경성에 맞서 인천갯벌의 마지막 희망인 고잔갯벌을 지켜려는 인천시민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 다만 시민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개발이익을 위한 매립보다는 갯벌의 보전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치바현 공무원의 마음가짐과 갯벌의 중요성을 강변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모르쇠’로 일관하며, 세계적인 자연문화유산인 인천갯벌을 일부의 개발이익을 위해 부동산투기장으로 전락시키려는 인천시의 태도가 다를 뿐이다.


 * 이 글은 2008년 8월 28일자 인천신문에 실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