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허브도시와 대한민국 심장도시
장정구 / 인천녹색연합 사무처장
요즘 새삼 ‘처음처럼’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개인의 좌우명을 넘어 가훈과 교훈으로도 친숙한 이 단어를 나는 계양산골프장 논란이후 부드러워진다며 흔들어보라는 유혹에도 ‘롯데’가 미워 마시질 않는 소주로, 더불어 사는 우리의 모습을 닮은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더 잘 기억하고 있다.
선택과 흥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참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이유로 변화의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누구를 향해 불게 될지, 불통과 독선의 중앙권력과 지난 권력에 맞서 인천을 진정한 해방구로 만들지, ‘거짓~녹색’에 이어 ‘뻥~연두’가 나타나진 않을지 기대와 염려 속에 바람의 속내를 조심스럽게 가늠하고 있다.
6.2지방선거가 전국적으로는 삽질과 불통의 MB표 4대강에 대한 국민들의 준엄한 경고였다면, 인천에서는 특혜와 불법의 롯데표 계양산골프장에 대한 시민들의 심판이었다. 인천의 자존심이고 시민의 쉼터이며 생태계 보고인 계양산에 골프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시장과 구청장, 시의원들은 시민들에 의해 자리에서 내려졌고, 계양산과 인천의 자연환경을 지키겠다고 공개약속한 당선자와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당선사례 현수막만이 시민 앞에 남았다. 그러나 애주가들이 모르는 사이에 ‘처음처럼’의 소유주가 바뀌었듯 과거의 뼈아픈 학습은 초심도 언젠가는 철거될 현수막과 같은 운명일지 모른다는 불신을 피어오르게 한다.
쓰레기천국 수도권매립지에는 매일 수백대 덤프트럭이 드나들고, 국제도시 송도와 청라에서는 날마다 타워크레인이 솟아나고, 하늘도시 영종도는 레저관광단지 포크레인 삽질에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철조망 해안가엔 발전소 굴뚝이 늘어서고, 불량하다는 주택을 밀어버린 곳에는 어김없이 고층아파트가 올라갔다. 지구온난, 기후변화를 아무리 외쳐도 탄소 흡수 자연녹지엔 자동차도로를 계획하고, 람사르협약과 생물다양성협약의 습지보호 국제약속은 딴 나라 일이라 무시한 채 갯벌매립, 조력발전 추진으로 세계5대 갯벌의 숨통을 조였다. 이것이 떠날 사람이 ‘동북아 허브도시’를 외치며 자랑했던 인천이다.
이제 오는 사람은 ‘대한민국 경제수도’를 외치고 있다. 그가 그토록 목청 높여 반대하는 MB도 역사와 생명의 터, 4대강을 파헤치며 ‘경제’를 살리는 일이라고 억지와 생떼를 쓰고 있다. 계양산골프장 중단과 경인아라뱃길 전면 재검토, 검단-장수간 도로 반대, 갯벌 추가매립과 조력발전 반대, 굴업도골프장 반대를 시민들과 공개적으로 약속했음에도 계양산골프장과 경인운하 등 환경현안에 대한 과거 입장과 지나간 사람들처럼 제일 먼저 ‘경제’를 챙기는 모습에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는 사람은 6개의 고속도로와 4개의 철도, 하늘길과 바닷길로도 부족해 새롭게 수십킬로미터의 해저터널을 뚫어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인천을 만들겠다고 선거공약에서 밝혔다. 현실성을 차치하고라도 생명살림, 공동체회복의 길이 아닌 자동차, 개발의 길만을 좇는 또 다른 삽질정책을 힘만 믿는 ‘황소’처럼 앞으로만 추진하지나 않을까, 경제수도가 삽질수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이젠 정말로 경제 살리기만을 내세우는 개발동맹과 그들을 비호하는 지방권력이 아닌 지역주민과 시민, 이웃생명과 미래세대를 위한 인천의 미래설계가 필요하다. 어디 한군데 정붙일 곳이 없어 빨리 돈 모아 떠나고 싶었던 인천, 발전과 성장이라는 블랙홀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던 인천을 우리아이들과 이웃생명이 어우러지고 저어새와 수십만 마리의 도요물떼새가 찾는 국제적인 명품생태도시로의 계획이 필요하다.
노자의 도덕경에 ‘貴以身爲天下子 可以寄天下(귀이신위천하자 가이기천하)’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제 몸처럼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가히 세상을 맡을 만하다’는 뜻으로 인천시민과 이웃생명을 자신처럼 여길 줄 아는 위정자라야 인천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티아라의 ‘처음처럼’에서처럼 인천, 우리아이들과 이웃생명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대고 터질 것 같고, 숨이 막히고 가빠오는’ 그런 울림이고 떨림이길 기대한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동북아 허브도시와 대한민국 심장도시’가 목적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은 ‘벽’에 ‘문’을 내어 보겠다는 발상도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는 결코 순탄치 않겠다는 걱정으로 이어진다.
* 이 글은 2010년 6월22일자 부평신문 부평칼럼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