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방치 심각 …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아라
바다에서 인천의 미래를 보다 – 2013 청소년기자단 ‘파랑‘ 과 함께<교동>
2013년 06월 18일 (화)
향교 인근 비석군 묘지 방불케해
삼도수군통어영지 쓰레기 한가득
동진나루·교동읍성 폐허 가까워
국가차원 관리·보존 필요성 대두
교동도는 삼국시대부터 교동으로 불려왔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수군절도부가 옮겨와 수도수비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섬 자체가 커 주민도 많이 살았지만 6·25때의 실향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다.
삼국시대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화개산성이 있는 곳, 예부터 수도로 통하는 길목에서 관방의 요충지로 중요시되던 교동도. 하지만 그 역사적 흔적은 지금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 소중한 역사적 문화재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방치된 채 잊혀져버린 은혜, 영세불망비
교동향교 인근에 자리한 읍내리 비석군.
이곳에는 교동도에 선정을 펼친 도호부사,삼도수군통어사, 방어사들에 대한 영세불망비 40여기가 다닥다닥 모여있다.
영세불망비란 ‘영원히 잊지 않겠다‘의 의미로써 선정을 베푼 지도자에 대한 백성들의 감사함이 담긴 비석이다.
읍내리 비석군은 강화군과 교동유림들이 관리상 편의를 위해 교동도 곳곳에 흩어져있는 비석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하지만 수십기의 비석들이 모여있는 모습은 흡사 묘지처럼 보여 당황스러움을 감출수 없었다.
관리상 편의를 위해 모아놓았지만 정작 비석들은 관리보다 울타리 속에 방치된 모습이다.
길가에 울타리로만 둘러싸여있는 모습은 영세불망비라는 비석의 본래 목적과 동떨어져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비석들을 통해 교동도의 역사를 자세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고 조선 관리들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 남산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에 방치돼 있는 계류석. 삼 도수군통제어영이 있던 흔적을 말해주는 유물이다.
▲한양으로의 문지기, 남산포 삼도수군통어영지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겨우 남산포에 도착했다.
교동향교에서 남서쪽으로 1㎞거리에 위치해 있는 남산포엔 조선 인조대에 설치된 삼도수군통어영지가 있다.
당시 이곳에는 수도인 한성 방어를 위해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을 옮겨와 설치했다고 한다.
이후 인조 11년 삼도수군통어영을 남산포 서쪽해안에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는 곧 강화도와 더불어 교동도가 군사적요충지로 여겨졌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경기, 황해, 충청 3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통제어영이 있던 흔적을 남산포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선시대, 군함들이 정박했다던 포구에는 폐기된 어망과 각종 쓰레기에 포구 한쪽을 내어준 채 안내표지판 하나만 쓸쓸이 이 곳이 삼도수군통제어영이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남산포 인근에는 당시 배를 정박시킬 때 묶어놓던 돌인 계류석 1기가 현존해 쓸쓸히 이곳이 삼도수군통여영지가 있던 것을 알려준다.
그마저도 남산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택가 쓰레기더미에 파묻힌 채 방치돼 있었다.
군함을 밧줄로 매어놓았던 계류석은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안내문 하나 없이 방치돼 있어 당혹스러울 뿐이다.
읍내리 비석군에서 느꼈던 부분을 이곳에서 다시한번 곱씹게 만들었다.

▲ 교동읍성 남문. 지난 1921년 폭풍우로 누각이 무너진 뒤 홍예문만 남은 채 방치돼 있다.
▲이제는 역사의 페이지속의 유물, 동진나루와 교동읍성
남산포를 지나 옛 고려시대부터 뭍과 이곳 교동도를 이어주던 동진나루에 도착했다.
배 한 척 없이 한적한 동진나루. 6·25까지 배들이 들락날락했다던 동진나루는 이제는 그 쓰임새를 잃은 채 바닷가에서 파도와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조선시대 한성으로 향하는 조운선과 물자를 운반하던 수송선들의 중간기착지였던 탓에 무수한 배들이 이용하던 항구였던 동진나루는 이제는 배들이 찾지 않아 사람들의 왕래를 잃어버렸다.
안내표지판 하나 없이 찾으러 오는 사람도 없는 동진나루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 파도소리만이 가득했다.
시멘트로 개보수를 한 흔적이 보였지만 절반만 그랬을 뿐, 썰물로 드러난 나머지 부분은 불규칙한 돌들을 쌓아놓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숙소로 오는 길, 교동읍성을 들렀다.
성벽은 온데간데없이 남문만 홀로 서 있는 교동읍성의 모습은 성이라기보다 폐허에 가까웠다.
성벽은 덤불로 덮여 있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고 지난 1921년 폭풍우로 무너졌다는 남문은 홍예문만 남은 채 쓸쓸히 서 있다.
교동읍성의 동문과 북문은 소실시기가 언제인지조차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채 홍예문만 남은 아치형 석축만이 남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같은 읍성이지만 복원이 돼 있는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을 떠올리게 했다.
해미읍성은 현재 천주교 순교순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방치된 채 관리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교동읍성을 보며 해미읍성처럼 복원작업을 거치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다.
교동도의 문화재들을 돌아보며 안타까움만 남았다.
실제로 교동도에 자리한 대부분의 문화재들은 보존되지 못한 채 방치된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국가차원에서의 교동도 문화재관리와 보존의 필요성이 시급하다는 생각만 하게 된 여행이었다.
/글=이풍민(인천외고 2년)·이익희(세일고·2년)
사진·정리=김상우기자 theexodus@itimes.co.kr
박두성 선생 생가 복원작업 절실
‘훈맹정음‘이라 불리는 한글 점자 창시자인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터가 쓰레기만 쌓인 채 방치돼있다.
인천시 강화군 상용면 교통리에 위치한 송암 선생의 생가터는 역사·문화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사유지라는 이유로 중요성에 비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방치돼있다.
한기출(64) 교동문화보존위원회 위원장은 “박두성 선생은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생각된다“며 “이에 따라 선생의 생가는 하루 빨리 복원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두성 선생 사후,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지난 1992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2002년에는 당시 문화관광부가 선정하는 문화인물로 등록하기도 했다.
인천시와 인천시의회 역시 송암선생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하는 선생의 생가 복원과 기념공원 조성등의 사업을 지원할 방침이었지만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 위원장은 “개인의 힘으로는 생가복원 등 관련 사업은 힘들다“며 “문제가 얼른 해결될 수 있게 시민들이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맹인들의 세종대왕‘이라고 불리는 박두성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맹인 교육에 힘썼고, 1926년 11월4일, 최초의 한글 점자인 ‘훈맹정음‘을 공표했다.
후에도 76종류의 맹인용 교육 자료를 보급하는 등 맹인 교육에 앞장서다 1963년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장호준(동인천고 2년)
강화조력電 정부·환경단체 대립 격화
정부는 조력발전이 신재생에너지라는 이유로 조력발전사업을 강행하려 하고 있지만, 환경단체는 댐 건설로 인해 주변에 미치는 환경파괴를 우려해 반대하고 있다.
강화조력발전주식회사는 일자리창출과 신재생에너지의 많은 부분 참여 등의 이점을 들어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인천환경운동연합은 “조력발전사업을 위해 하루에 투입되는 인원은 206명이지만 완공 후, 상주 근무인원은 40명에 불과하다“며 “일자리창출보다 수산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조력발전소 완공 후 오히려 일자리를 잃는 피해를 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강화 조력만 발전에서 생산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력은 전체 발전 전기의 7.1㎾로 0.8%에 불과하다.
강화조력사업은 지난 2011년 국토해양부의 ‘공유수면매립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2012년 자진해 사업을 철회한 상황이다.
하지만 최근 다시 강화조력발전에 대한 추진을 계획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장정구 인천녹색연합 사무처장은 “댐을 건설하게 되면 흐르던 물의 흐름을 막게 되어 물의 수질이 악화된다“며 “물의 수질이 악화되면 바다생태계에 큰 변화가 생긴다“는 입장을 밝혔다.
교동도 주민 송성호(58)씨 역시 “조력사업을 시행하게 되면 어민들에게 피해가 있을 것“이라며 “인위적으로 자연적인 힘을 거스르는 것은 언젠가 피해가 되돌아올 것이다“는 의견을 밝혔다.
/김태윤(서운고 2년)
인천일보 원본 보기 http://news.i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9556
인천녹색연합과 인천일보는 인천-경기지역 고1-2학년 24명과 함께
청소년인천섬바다기자단(파랑)을 꾸려
인천 섬에 다니며 발굴한 생태,문화,역사,인문학적인 가치를
일반기사,인터뷰기사,르포기사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엮어낸 내용은 인천일보와 인천시교육청소식지에 실립니다.
위 내용은 첫번째 취재 ‘교동도’의 내용을 담았습니다.